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문단 편집) ==== [[신민주공화당]] ==== || [[파일:신민주공화당 로고.svg|width=200]] || 1987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며 만든 정당. 약칭은 민주공화당과 같은 공화당이었다. 창당 직후 한국국민당의 국회의원과, 이전에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의 세력들이 합류하며 어느 정도의 당세를 갖추게 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 총재인 김종필이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8.1%로 4위를 기록하며 낙선하였다. 당시 대선 직전에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로 표가 몰리면서 그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충남, 대전 등지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하며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획득하여 원내교섭단체가 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충남에서만 지역구 13석을 획득하여 본격적으로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이 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정의당과 노태우정부를 견제하며,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야당들과 달리 확실한 대권주자가 없어[* 김종필 역시 3김 중 하나라 하지만, 당장 13대 대선에서 YS나 DJ가 받은 득표율과의 차이만 보아도 둘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0% 이상을 획득하며 단일화했을 경우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자되는 둘과 달리, 김종필은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이미지 등으로 인하여 8%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 부각되지 않았으며, 소위 박쥐로 많이 불렸다. 이러한 야당의 설움으로 인해 김종필은 의원 내각제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1990년]] [[삼당합당]]으로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13대 총선에서는 여야간 절묘한 의석 구성이 이루어져서, 여야간의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안이 통과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구상하기에 이르며, 초기에 노선이 비슷한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두 당의 의석 합계로는 부족했기에 통일민주당을 끌여들여 보수대통합을 이루고 개헌가능선을 넘게 된다. 합당의 조건으로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제시하고, 노태우와 김영삼은 이를 수락해 각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내각제 개헌은 대통령 욕심이 있던 김영삼이 나중에 반대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김종필은 탈당 후, 정치 성향이 완전히 달랐던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연합을 하면서까지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하고 2004년 정계를 은퇴한다.] 결국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으며, 김종필과 박태준은 신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최고위원 직을 맡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김종필을 보스로 하였다는 점과 인적 구성원의 유사성때문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분당되어 1995년 창당한 충청권 보수의 시초인 자유민주연합의 뿌리를 이 정당에서 본다. 충청권 보수는 이후 자민련을 거쳐서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까지 이어져 내려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